‌구스타브 옆 구스타브


구스타브 옆 구스타브

구스타브라는 이름은 중세 슬라브어 ‘Gostislav’에서 유래된 것으로 영예로운 손님(glorious guest)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유럽 북부를 통해 유입된 이주자들로 인해 이 이름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스웨덴의 독립을 이끈 국왕 구스타브 1세(Gustav Vasa, 1496-1560) 이후 남자아이에게 흔하게 붙여지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올해가 오스트리아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구스타브 클림트의 사후 100주년이기에 이번 칼럼에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을 클림트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와 직접 영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 혹은 동시대를 살며 이름을 남긴 구스타브들의 지도를 살펴보는 재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
클림트는 두 친구들과 함께 ‘예술가컴퍼니’를 결성하고 사진보다 더 세밀한 그림을 그려 이미 20대에 부와 명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1894년, 빈 대학의 천장화를 의뢰받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린 그림이 ‘추악한 포르노그래피’라는 혹평을 받은 이후 국가기관과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빈 미술계 내에서 보수적인 화가들과 진보적인 화가들 사이 의견대립이 일어나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20명의 화가들은 ‘빈 분리파’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가 본인의 감성과 철학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또 다양한 예술 장르들을 융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이로 인해 사회가 변화되기를 꿈꿨습니다.
평생 여성의 육체, 성, 욕망, 사랑, 삶, 죽음을 그렸던 클림트. 당시 보수적인 빈에서 관객들을 유혹하는 듯 나른한 자세로 몽롱하게 시선을 맞추는 그림 속 여인들은 매번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금속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금박과 은박을 천재적으로 사용했던 ‘금색 시기’를 거쳐 노년에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의 풍경화에는 사람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항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심적 고통을 받았던 클림트였기에 풍경화에서만큼은 완벽하게 평화로운 상태를 구현해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급사한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영향으로 평생 정기적으로 산책을 하며 건강에 신경 썼던 클림트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56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삶도, 죽음도 늘 예고 없이 클림트를 찾아왔고 클림트는 그 특유의 씩씩한 발걸음으로 멈추었다가도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

‌“나에 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자했는지 알아내면 될 것이다.” -구스타브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 (Emilie Louise Flöge, 1874-1952, 오스트리아)
클림트는 예술적으로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경지에 올랐지만 사적으로는 그리 본받을 만한 예술가는 아닙니다.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고 클림트 생전에 태어난 자식이 3명, 사후 클림트의 자식을 낳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14명이라고 합니다. 클림트는 56년을 살면서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에밀리 플뢰게와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사이를 유지하며 지냅니다.
클림트보다 12살 어린 에밀리 플뢰게는 클림트의 남동생 에른스트 부인의 여동생으로 자매들과 함께 빈 시내에서 ‘플뢰게 패션살롱’을 운영했던 커리어우먼이었습니다. 코르셋 등 여성성을 과장하는 비실용적인 복장이 주였던 시대에 플뢰게 자매들의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옷들은 귀족부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빈의 유행을 주도했습니다. 클림트도 플뢰게가 만든 헐렁한 파란색 가운을 입고 작업을 했습니다. 클림트는 한 번도 시인한 적 없지만 그의 대표작 ‘키스’ 속 여성이 에밀리 플뢰게라는 설이 유력한데 그 이유는 클림트가 재산의 반을 에밀리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구스타브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
빈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또 소유했던 알마 말러 베르펠(Alma Mahler-Werfel, 1879-1964, 오스트리아).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알마에게 나이가 많은 유명한 예술가는 아버지를 대체하는 상대이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였습니다. 이태리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20세의 알마와 그녀보다 17살 연상인 클림트는 첫 키스를 하게 됩니다. 클림트를 예전부터 사모해왔던 알마는 첫 키스 후 일기장에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합일 같은 남자”라고 쓰지만 이 사건을 알게 된 알마의 의붓아버지이자 클림트의 동료인 카를 몰의 경고로 클림트는 순순히 물러납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알마는 19살 연상의 말러와 결혼하지만 보수적이고 알마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 지원해주지 않았던 말러와의 의견 대립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알마 외에도 클림트와 말러 사이에 또 다른 접점이 있습니다. 1902년, 클림트가 속해있는 빈 분리파의 제 14회 전시에 말러도 참여한 것이죠. 빈 분리파의 전시공간인 제체시온에서의 개막식에서 말러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을 편곡,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 스위스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쳤던 융은 개인화, 동시성 원리, 집단 무의식, 콤플렉스, 외향성과 내향성 등에 대한 유명한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는 이 젊은이에게 관심을 갖고 오랜 기간 의견을 주고받으며 정신분석학에 대한 합동연구를 하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연구를 계승할 후계자로 보고 있었지만 융은 프로이트의 신조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프로이트와 클림트의 접점도 한 번 살펴볼까요. 클림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요소가 모자이크 양식, 황금, 프로이트의 이론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깊은 무의식 속 본능이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발표 이후 클림트는 성의 위력과 공격성에 대해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오늘날 클림트 연구자들은 ‘클림트의 그림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1848-1894, 프랑스)

카유보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세잔 등 인상파 동료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작품들을 수집했던 화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예술철학을 지지해주고,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후원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데 그 역할을 자처하며 프랑스 인상파 미술이 보존, 계승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카유보트는 그가 소장한 인상파 그림들을 나라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당시 루브르에 인상파 그림들이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만 받아들여지고 나머지 그림들은 거절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여성다움, 성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평생의 그림 주제로 삼았던 반면 카유보트는 남성다움, 남성의 신체를 주로 그렸습니다. 또 19세기 급변하는 파리의 모습과 그 속의 파리지앵들도 생생히 화폭에 담으며 ‘파리를 가장 아름답게 그린 화가’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알렉상드르 구스타브 에펠 (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 프랑스)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하는 세계 박람회를 위해 지은 완전 철골조의 에펠 탑은 1889년 완공 때부터 1930년까지 41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습니다. 완공된 직후 에펠 탑은 ‘쇳덩이로 만든 아스파라거스, 기념탑 중 최악,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고, 에펠 탑이 없는 파리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는 발표하는 그림마다 수많은 혹평과 비난을 받았지만 사후 생전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 클림트와 비슷합니다. 에펠은 건축자로서의 활동에서 은퇴한 이후 기상학, 공기역학자로 진로를 바꾸었고 이 두 분야에서도 큰 공헌을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