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세에 인생 전성기를 맞은 야나체크

레오시 야나체크(Leos Janáček, 1854-1928)

예전에는 전공과 흥미 등을 살려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면 요즘에는 ‘직업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만큼 많은 청년들이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 주변만 봐도 전문연주자 활동, 오케스트라 입단, 학교 출강 등 잘 풀린 케이스도 있고,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20대에 작곡 공부를 시작, 피아노조차 살 수 없을만큼 불안정한 생활을 했지만 62세에 실력을 인정받아 늦깎이 성공을 누렸던 체코 출신 작곡가 야나체크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이 곧 체코

11세 때 성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성가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정도로 노래를 잘했고, 피아노와 오르간 실력 또한 뛰어났던 야나체크. 하지만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교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교직 생활을 하던 야나체크는 25세 때 다시 피어오른 작곡에 대한 열망을 누르지 못하고, 그 당시 독일권 최고의 음악학교로 여겨지던 라이프치히 콘서바토리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 슬슬 수업을 빠지더니 겨우 4달 반만 다니고 그만두게 되는데, 학교 분위기가 너무 독일식인데다가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학자 스타일의 선생님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라이프치히 못지않게 유명한 비엔나 콘서바토리에 가서도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2달 만에 끝납니다. 교내 작곡 콩쿨에 지원했다가 입상하지 못하자 ‘체코 출신의 작곡가를 망신주기 위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야나체크의 망상이 아니었습니다.

비엔나 콘서바토리를 그만두고 고향인 체코 브르노(Brno)로 돌아간 26살의 야나체크는 독일 혈통의 Zdenka(1881–1928)를 만나 결혼합니다. 연애 때는 독일어로 대화했지만 결혼 후에는 오직 체코어로만 이야기하자고 주장했던 야나체크. 그녀의 부모님은 ‘체코어는 하인들이나 쓰는 언어’라며 수치심을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무렵 야나체크의 애국심은 극에 달했고, 독일인 및 오스트리아인을 미친 듯이 싫어했습니다. 당시 체코인들의 대부분이 그랬는데 이는 1620년, 오스트리아가 체코와의 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세금을 많이 떼어가고, 지주를 없애는 등 체코가 가난, 불행해지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죠. 심지어 체코어는 200년 동안 학교, 신문, 의회에서 쓰이지 못했고, 체코어로 쓰인 책은 불태워졌고, 체코어는 문맹 하인들끼리만 쓰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19세기 초 언어, 음악, 전통문화에 이르기까지 ‘체코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시기 체코 예술가들은 가장 체코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를 합니다. 특히 야나체크는 어렸을 때부터 민속음악에 관심이 깊어서 민속학자, 방언연구가와 만남을 갖기도 하고, 민속음악을 수집하고 다녔습니다. 민속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를 거의 처음 사용한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죠. 또 체코어의 리듬과 억양에서 영감을 받아 ‘Speech Melody’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어 음악에 적용시켰는데 이는 후대 작곡가인 드보르자크 등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체코가 곧 그의 음악이자 그의 음악이 곧 체코였던 셈이죠.



야나체크의 딸 올가



인생의 터닝포인트

1902년, 야나체크는 딸 올가와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고 이후 딸은 러시아에 남아서 언어공부를 하게 됩니다. 올가는 몇 달간 심하게 앓다가 이듬해 사망하죠. 야나체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오페라 ‘예누파 Jenůfa’에 담아내고 죽은 딸에게 헌정합니다. 1904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호평을 받았으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 그의 결혼생활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이는 오랜 희생과 인내, 무명으로 지내며 스트레스가 쌓였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편지 내용을 보면 “난 녹초가 되었어. 오죽하면 내 학생들이 나에게 어떻게 작곡해야 하는지 조언을 해줬다네.”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렇게 중년까지도 개인적, 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야나체크는 늦게 필 운명이었나 봅니다. 62세에 오페라 ‘예누파’ 개정 버전이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연주되며 그의 작곡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과 명성을 맛보게 됩니다. 야나체크의 대표작들은 모두 50대 이후의 작품들입니다. 심지어 70대에 작곡한 작품들인 ‘신포니에타’,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 ‘바이올린 소나타’, ‘목관 6중주- 젊음’, ‘글라골리트 미사’ 등이 줄줄이 유명세를 탔고 이 작품들로 인해 이전 작품들 또한 무대에 올려지게 됩니다.

70세 때는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기도 했고요. 74세에 급성폐렴에 걸려 사망하자 대대적인 공개 장례식이 열리고 그의 오페라 ‘Cunning Little Vixen’ 마지막 씬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국립묘지에 묻힙니다. 사후에는 그의 삶을 다룬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이 몇 차례 나왔고, 1954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오케스트라 Janáček Philharmonic Orchestra가 창립됩니다. 심지어 야나체크의 삶에서 영감 받은 락음악도 있습니다. 락밴드 Emerson, Lake & Palmer의 ‘Knife-Edge’입니다.




피아노 살 돈이 없어 식탁에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했던 청년 시절, 50년이 넘는 긴 무명생활 끝에 맛본 달콤한 성공, 결국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된 야나체크. 개나리는 노란 얼굴로 봄을 알리고, 장미는 여름 햇살 아래 흐드러지고, 코스모스는 가을바람에 주억거리고, 동백꽃은 눈의 무게를 견뎌내며 겨울에 피죠. 당신이 꽃 피는 계절도 당신만의 속도로 찾아오지 않을까요?



‘당신이 되고 싶었던 어떤 존재가 되기에는 지금도 결코 늦지 않았다.’

- 영국 작가 조지 앨리엇(George Eliot, 본명 Mary Ann Evans, 1819-1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