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눈물 흘리다

2019년 가을,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예술’로, 런던에서는 매일 미술관을, 비엔나와 파리에서는 매일 클래식 공연을 관람하며 예술적인 분위기에 푹 빠져 있다가 왔죠. 이번 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 저에게 다양한 영감을 준 예술 작품들과 감상을 하나씩 들려드리려 합니다.



실제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살았던 집 앞 골목 풍경. 저녁 6:30분 경이다.



비엔나모차르트하우스의 오디오가이드와 티켓. 한국어 가이드도 있어 매우 재미있게 관람했다.




비엔나의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활동하던 모차르트는 엄격한 대주교와의 마찰로 25세 때 비엔나로 이주했습니다. 왕이나 교회에 소속된 전형적인 음악가의 삶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로 살며 후대 음악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죠. 모차르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엔나에서 11년 동안 살았는데, 그중 1784년부터 3년간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에 살았던 집(Mozart Haus Vienna)을 방문했습니다. 이곳의 티켓 가격은 11유로. 한국어 지원이 되는 오디오 가이드 포함입니다. 모차르트가 쓴 편지나 어록을 감칠맛 나게 읽어주는 성우 목소리와 함께 생가에 비치된 사진, 그림, 악보, 영상물들을 꽤 흥미롭게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하던 중에도 연주 여행을 다니고, 부유한 후원자들의 연주에 불려 다니고, 밀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바쁘게 지냈던 모차르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음악가답게 높은 수입과 명예를 바탕으로 비엔나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껏 누립니다. 한 달 수입이 비엔나의 일반적인 가정 1년 생활비의 10배가 넘던 그였지만 고급 마차, 카드게임, 당구, 불법도박 등 수입을 넘어서는 소비, 사치에 빠져 말년에는 귀족 친구에게 절박하게 돈을 빌리는 편지를 여러 차례 쓰기도 했죠.




모차르트 VS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

살리에리는 원래 이탈리아 출신입니다. 궁정의 초청으로 비엔나에 왔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궁정작곡가로 임명된 경우로 당시 높은 존경을 받았던 작곡가입니다. 베토벤·슈베르트·리스트의 어릴 적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84년 작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신 분들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대결 구도를 눈여겨보셨을 겁니다. 2인자가 1인자에게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증상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심지어 살리에리의 음모로 모차르트가 죽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하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살면서 딱 한 번 마주쳤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가 둘을 불러 짧은 오페라 작곡 미션을 주고,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의 투표로 우열을 가리게 했다고 합니다. 이 대결에서 살리에리가 이기고 상금으로 100굴덴을, 모차르트는 50굴덴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유작, 레퀴엠(Requiem)

레퀴엠은 죽은 이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하느님께 청하는 곡으로 위령미사 때 연주되는 교회 음악입니다. ‘진혼곡’으로 번역되어 불리기도 하죠. 레퀴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라틴어로 된 입당송의 첫 구절이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입당송(Introitus)·자비송(Kyrie)·부속가(Sequientia)·봉헌송(Offertorium)·감사의 찬가(Sanctus)·축복송(Benedictus)·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영성체송(Communio)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를리오즈·슈만·리스트·베르디·드보르자크·포레 등 많은 작곡가가 레퀴엠을 작곡했지만 그중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제일 유명한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 봄, 신원미상의 한 남자로부터 레퀴엠 작곡을 의뢰받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나오는 장면이죠. 50두카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한 데다 절반의 선금을 준다고 하니 모차르트는 덥석 응하고는 오페라 마술피리, 클라리넷 협주곡 등 다른 곡 작곡으로 바쁜 와중에도 레퀴엠의 작곡을 이어나갔습니다. 그해 가을쯤 과로, 발열, 발진으로 인해 앓아 누울 지경이 되자 의사를 불렀는데 의사는 당시 흔한 치료법이었던 부황을 뜨고, 피를 뽑아주고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맞는 치료법이 아니었는지 모차르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결국 제자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 1766-1803)의 도움으로 죽기 12시간 전까지 침실에서 레퀴엠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가 죽자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Constanze Mozart, 1762-1842)가 제일 먼저 한 일은 3달 만에 레퀴엠을 완성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나머지 절반의 금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레퀴엠은 의뢰자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의 유작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1793년 1월, 그녀를 위해 성사된 자선 연주회 때였습니다.


레퀴엠을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봐야 하느냐는 논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악장인 ‘눈물과 한탄의 날(Lacrimosa)’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쓴 부분은 바이올린 선율 1마디, 성악 부분 8마디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 시킨 부분이 모차르트의 음악성에 못 미친다는 의견, 당시 모차르트 여러 작품의 작곡 보조를 도왔었고 비엔나 음악계에서 이름 있었던 작곡가인 쥐스마이어의 가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 의견,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이후 여러 명의 작곡가가 다양한 판본을 제시했지만 현재는 쥐스마이어 판이 제일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던 성 카를 교회



이번 여행에서 쥐스마이어 판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732년, 카를 6세가 흑사병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며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Karlskirche(성 카를 교회)에서요. 모차르트가 실제로 생활했던 집에 다녀온 직후라 그런지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었고, 원전 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나는 경건한 울림, 둥글게 울리며 승천하는 교회 특유의 음향, 음악과 대비되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장식된 교회 내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눈과 귀를 자극했습니다.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나라, 계절, 시간대, 공연장, 나의 경험이 곡에 대한 감상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모차르트의 혼이 담겨서일까요. 비록 미완성이지만 곡이 주는 울림만큼은 생전에 작곡했던 그 어떤 곡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레퀴엠. 오늘은 그의 짧았던 생을 기리며 레퀴엠을 한음 한음 음미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것은 제 죽음의 노래입니다. 미완성으로 남겨 둘 수 없어요.”

-모차르트가 극작가 로렌조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 중